딘 버크 박사

불소화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야모야니스를 매우 존경하며, 그와 동시에 딘 버크 박사를 존경합니다. 아마 야모야니 박사보다는 못하지만 비슷한 정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딘 버크 박사가, 미국 국립암연구소에 근무했다는 것만 가지고 그가 대단한 사람인 줄 착각하고 있는데, 실제로는 그렇기 보기 어려운 면이 많습니다. 딘 버크 박사가 생화학에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고, 우리가 흔히 사용했던 라인위버 버크 플롯에 관한 논문을 발표한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의 생화학적인 업적과는 달리, 다른 업적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면이 많습니다.

아래의 글에서만 다음과 같은 부분이 있습니다.

 

이글을 번역한 사람이 과연 생화학 지식이 있는 사람인지 의아합니다. 비타민 B-17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타민 B-15 혹은 B-13 도 들어보신 분들이 없을 것입니다. 비타민 B-17에 대한 그의 논문은 사실 엉터리라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아미그달린을 하나의 식품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아미그달린은 흔히 말하는 살구씨등의 매우 쓴 성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성분은 버크의 주장과는 달리 인체 안에서 청산을 형성하기 때문에 매우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청산 성분으로 인하여 암세포를 죽인다는 것입니다. 청산이 암세포를 죽인다는 것은 세포 독성이 있다는 것인데 하나의 식품으로 간주하라고 말하는 것은 비상식적인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딴지일보에 실린 레트릴 관련 글을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아래글은 녹색평론에서 퍼온 것입니다.

 

불소화가 암사망률 높인다

  불소-암 연관 밝힌 딘 버크 박사
  네덜란드 불소화 종식 기여

  H.L. 매키니 

 

 불소가 인체에 미치는 치명적인 영향 가운데 하나는 암과 관련된 것이다. 미국의 딘 버크와 존 야무야니스에 의해 작성된 아래 그래프는 불소화지역과 비불소화지역의 암발생률 차이를 명확히 보여주는 대표적인 연구결과를 나타낸 것이다. 우리는 이 연구결과의 신빙성에 관련하여 연구의 주체 중의 한사람인 딘 버크 박사가 과연 어떤 사람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딘 버크(Dean Burk, 1904-1988)는 미국 국립암연구소(NCI)의 선임 연구원으로 35년간 재직하였고, 은퇴후 미국의 저명한 반불소화 투쟁가 존 야무야니스와 공동으로 불소화와 암 발생의 연관관계를 밝히는 대규모의 역학연구를 행함으로써 수돗물불소화의 위험성을 과학적으로 입증하는 중요한 연구성과를 내놓았다. 이 연구는 1978년 네덜란드 국회가 수돗물 불소화를 불법화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다음 글은 버크 박사가 타계한 뒤 그를 추모하기 위해 미국 캔사스 대학의 매키니(H.L. McKinney) 교수에 의해 씌어진 프로필로서 국제불소연구학회(International Society for Fluoride Research)의 학술지 Fluoride 22권 3호(1989년 7월)에 발표되었다.

《불소화반대소식》1999년 12월 제2호


딘 버크를 추모하며   


  과학계와 인문학계는 1988년 10월 6일 향년 84세의 딘 버크의 죽음으로 주요한 지성을 한사람 잃었다. 버크는 1904년 3월 21일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에서 현재의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 전신(前身)의 학장이었던 프레드릭 버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5세에 데이비스에 있는 캘리포니아대학 농학부에 입학하여 농업에 대해 공부하였다. 일년 후 그는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 분교로 옮겨, 거기서 1923년에 곤충학 학사가 되었다. 4년 후 23세에 그는 식물영양학과 화학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화학자로서의 업적들
  그는 계속하여 국립연구위원회, 런던대학 유니버시티 칼리지, 베를린의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 그리고 하버드대학에서 펠로우로서 연구생활을 하였다. 그는 또 독일로 가서 오토 마이어와 함께 질소고정에 대해 연구하고, 오토 바르부르크와 친교하였다. 두 독일 사람 모두 노벨상 수상자들이었다.

  버크는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생화학자라고 할 수 있는 바르부르크와 40년간의 우정을 유지하였다. 1950년에서 바르부르크가 타계하기 일년전인 1969년까지 버크는 대부분의 여름을 베를린에서 지내면서《암과 광합성에 관한 바르부르크의 가장 중요한 기여들》을 번역하였다. 1953년에 그는 바르부르크 연구소의 해외회원이 되었다.

  1935년에 버크는 또한 소련의 과학아카데미에서 객원 연구원으로서 일할 기회를 가졌다. 그리고 1937년 여름에 저명한 생화학자 A.N. 바하와 V.I. 엥글하르트 밑에서 연구생활을 시작하였다. 정부기관에 근무하는 동안 버크는 여러해에 걸쳐 많은 시간을 영국과 독일, 그리고 소련에서 보냈다. 그는 또한 유럽에서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등으로 세계전역에 걸쳐 여행을 하였다. 그는 수많은 국제회의에 참석하였다. 그는 독일어와 불어에 능통하였고, 약간의 러시아말을 할 수 있었다.

  버크의 전문과학자로서의 생애는 1929년 워싱턴 디씨에 있는 농무부 화학 및 토양국의 질소고정 실험실의 물리화학자로서 시작되었다. 1939년에 그는 그 자리를 떠나 국립암연구소(National Cancer Institute)에 소속되어 1974년 은퇴시까지 거기에 머물렀다. 따라서 그의 공무원으로서의 생애는 45년간 지속되었다. 동시에 그는 1939년에서 1941년까지 코넬대학 의학부의 생화학 부교수로 일했고, 1947년부터 별세할 때까지 죠지워싱턴대학 대학원에서 리서치 마스터라는 명예직을 갖고 있었다. 1974년에서 1976년까지 그는 미국해군연구소의 객원 과학자이기도 했다.

  250편 이상의 과학논문을 발표한 그의 주된 공헌을 떠나서도, 버크 박사는 또한 1953년에 미국화학회가 주는 힐리브란드상을 수상함으로써 광합성에 관한 지도적 과학자로서 인정받았다. 그는 또한 1965년에 탁월한 암 연구로 게르하르트 도마크상을 받는 특별한 영예를 누렸는데, 이 상은 보통 독일이나 스위스 또는 오스트리아 과학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상이었다.    버크는 아마도 생화학자들에게는 1934년에 그가 한스 라인위버와 공동집필하여 미국화학회지(Journal of American Chemical Society)에 발표한 논문 <효소분리상수 결정(The Determination of Enzyme Dissociation Constants)>의 저자로서 가장 잘 기억될 것이다. 그 논문은 생화학에서 가장 빈번히 인용되는 논문이기 때문이다.

  1974년 11월 18일에 은퇴한 뒤 버크는 "건강, 영양, 그리고 암을 포함한 만성적 및 퇴행적 질병을 연구하는 데 헌신하는" 딘 버크 재단을 세웠다. 두 개의 주요 보고서가 이 재단을 통하여 발표되었다. 하나는 비타민B-17에 집중하면서, 비타민B-15와 비타민B-13에도 간단히 언급하는 논문이었다. 버크는 연방정부의 식품, 의약, 화장품에 관한 법률을 면밀히 분석하여, 결론적으로 아미그달린(비타민B-17)이 "과학적으로 하나의 식품, 비타민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불소화와 암의 관련성을 밝히다
  또하나의 집중적 관심사는 불소화와 암과의 연관관계였다. 1975년 1월 은퇴직후 그는 존 야무야니스 박사를 처음으로 만났다. 야무야니스는 일찍이 세계적인 화학관계 정보전문지〈케미칼 앱스트랙츠(Chemical Abstracts)〉의 생화학 분야 편집자와 '전국 건강연합(National Health Federation)'의 과학부장을 지낸 생화학자로서 불소화에 대한 맹렬한 반대투쟁가였다. 버크는 야무야니스가 어째서 "그러한 가망없는 문제를 추구하면서 무엇보다도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1975년 5월경 야무야니스는 몇몇 주요 불소화 도시와 비불소화 도시간의 암 발생률을 비교하는 그동안의 연구성과의 확대판을 끝냈다. 그 논문은 클린턴 밀러에게 보내졌고, 밀러는 그것을 국립암연구소로 가져갔다. 거기서 그 논문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밀러는 딘 버크에게로 가서 그 논문을 한번 읽어주기를 부탁했다. 버크는 다시한번 비판적인 태도로 야무야니스가 '무가치한' 일에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자신의 의견을 되풀이하였다. 불소와 암 사이의 연관관계가 있다면 이미 그것은 연구, 발견되었을 거라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논문을 읽고 비판해달라는 밀러의 부탁을 들어주는 데 마침내 동의했다. 온 밤을 새우고, 며칠을 걸려 자료를 꼼꼼히 분석한 뒤에 버크는 야무야니스의 논리가 건전하고 설득력이 있으며, 그 자신의 강한 편견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정확한 것이 분명하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불소화와 암의 관련성을 전혀 새로운 조명속에서 보기 시작하였다. 밀러는 야무야니스를 버크의 집으로 데려왔고, 그 이후 오래 계속된 두사람 사이의 중요한 협력관계가 시작되었다.

  버크의 예비적 발언은 불소화와 암 사이의 있을 수 있는 연관관계와 어떠한 암 유발물질도 식품이나 먹는물에 첨가되어서는 안된다고 규정하고 있는 연방법률을 논의하는 논문을 자신의 재단사업으로 하자는 것이었다. 만일 불소화와 암의 연관성이 틀림없는 것이라면, 법률상 불소화는 즉각 중단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립암연구소는 되풀이하여 그러한 연관성을 부인했다.

  버크의 제안으로 그 자신과 야무야니스 사이의 세밀한 협력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는 버크의 "두번째로 가장 중요한 논문"으로 나왔다. 두 저자는 "미국의 10대 불소화된 도시들에서의 암 사망률이 불소화 이전 시대에는 근본적으로 동일한 암 발생률을 보여주던 10대 비불소화 도시들에서의 암 사망률보다 더 높고, 빠르게 상승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들의 발견에 의하면, 이 증가율은 45-65세, 그리고 65세 이상의 사람들에게 나타나고, 나이, 인종, 성별을 고려하더라도 명백한 차이를 나타내었다.

 

불소화와 암사망률의 관계

불소화와 암 사망률의 관계

세로축: 인구 10만명의 사망 중 암 사망률
가로축: 연도
검은점: 1957년 이전(1952~1956년 사이에 시작됨)에 불소화된 10대 도시에서의 연평균 암 사망률
흰점: 1969년까지 불소화되지 않았던 10대 도시들의 연평균 암 사망률을 나타낸다.

 


  풍부하고 값진 삶
  불소화 주창자들로부터 신속하고 적대적인 비판이 나왔다. 비판은 나이와 성별과 인종과 지역에 따른 암 발생 분포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적절한 '조절'(즉, 조작)이 가해진다면 ― 이것은 불소화론자들이 늘 되풀이하는 논리인데 ― 불소화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판명된다는 것이었다. 이 논쟁은 십년이 경과한 지금도 격렬히 계속되고 있다.

  버크는 사실상 그의 마지막 과학논문이 된, 이 문제에 관한 최종적인 발언에서, 자신의 강한 과학적 신념을 재확인하였다. 즉, 중심적 도시들에서의 두 집단의 인구상의 변화를 고려하더라도 불소화와 암 사망률 사이의 명백한 인과관계는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의 결론에 의하면, 대개 15-20년간에 걸쳐 불소화된 물을 마셔온 사람들의 경우 연간 10만명당 20 내지 30명의 추가적 암 사망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버크와 그의 공동연구자들은 이렇게 호소하였다. "이러한 결론에 비추어볼 때, 우리는 세계의 문명국 정부들이 수돗물불소화를 즉각 중단할 것을 촉구한다." 그렇게 되면, 수십만의 불필요한 죽음이 ― 한때는 미국에서만 40만명으로 그는 추산하였다 ― 회피될 거라는 것이었다.

  생명을 구한다는 것이 버크의 일차적인 관심사였다. 그는 불소화에 관한 그의 연구가 일생동안 그가 했던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의심할 나위 없이, 그가 개인적으로 가장 보람을 느낀 순간의 하나는 그의 연구가 네덜란드에서 불소화를 종식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였다.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언론에서 그의 연구가 널리 보도되었다.

  딘 버크 박사는 음악가, 예술가, 과학자, 현인이었다. 그는 풍부하고 값진 삶을 살았다. 그는 250여편의 과학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는 난해한 신비를 탐구하고, 심원한 해답을 내놓았다. 그는 자신의 일생을 과학과 인류를 위해 바쳤다. 그는 그가 지나가는 곳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세계는 그와 같은 고결하고 용기있는 천재, 박애주의자의 존재로 해서 더 풍부한 곳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