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학은 우리에게 무었인가?


 

신과학(New age science)이 우리에게 다가 오기전에 New age는 이미 오고 있었습니다. 전 new age라는 단어에 그다지 저항감을 갖고 있지 않는데 아마 그것은 new age음악가들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조지 윈스턴의 앨범 December의 Thanksgivings를 연습하다가 포기할 때 생각이 듭니다. 좀 어렵더군요. 음악은 좋죠. 영화 ordernary people (보통 사람들)에서 나온 파헬벨의 케논 변주곡을 조지 윈스턴이 피아노 곡으로 참 듣기 좋게 편곡했습니다. 그 음악을 듣는 것이 new age를 이해하는데 조금은 도움이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신과학은 어떻게 왔을까?

우선 신과학은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인가에서 시작했을 수도 있지만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시작은 "The Turning Point (새로운 과학과 문명의 전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전까지 일부의 관심만을 가진 사람들만이 읽었던 "현대 물리학과 동양 사상(the Tao of Physics)"이라는 책과는 달리 폭넓은 지식으로 New age를 소개했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즉 "새로운 과학과 문명의 전환"이 있고 그전에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이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 짚고 넘어갈 것은 그 책이 있기 전에 제레미 리프킨의 "엔트로피"가 이미 기반을 닦아 놓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실 "엔트로피"가 미친 영향은 그 이후 어떤 책이 미친 영향보다 더 컷다고 생각합니다. 제레미 리프킨의 엔트로피는 이미 그때 기계론적 세계관에 대해서 비판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비판은 상당히 시기 적절한 것이었고 매우 탁월해 보였습니다. 그 책은 제가 아는 책중에서는 드믈게 상당히 많은 곳에서 번역이 되었습니다. 이책이 미국에서 1981년인가에 미국의 Viking사에서 나왔고 우리나라는 1983년에 나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 책이 그려낸 것은 사실 New age는 아닙니다. 하지만 이 책은 우리가 얼마나 기계적인 세계관이 찌들어 살고 있는지는 분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나온 프리죠프 카프라의 "새로운 과학와 문명의 전환"이라는 책은 엔트로피의 후속편처럼 우리에게 다가왔었습니다.

저는 지금은 New age에 반대를 하지만 그 당시는 그 내용이 맞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전 New age에 지금도 어느정도 빚을 지고 있습니다. 그 책이 우리들에게 던진 질문은 여러 가지가 있고 여러사람이 다 다르게 느꼈지만 제가 느낀 것은 "가치"란 무었인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기계론적인 세계관에서 말하는 가치와 당신의 가치가 일치하는가라는 질문이었고 그것은 사실 매우 어렵고도 한번쯤은 짚고 넘어가야할 것임에는 분명했습니다.

예를들어 프리초프 카프라는 경제라는 것은 돈으로 모든 가치를 환산해서 다룬다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그러므로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가치들은 아니 돈으로 적절하게 환산되지 않는 가치들은 돈으로 환산되는 가치에 비해서 경제학에서 다루기 어렵고 사실상 다루지도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환경의 가치를 적절하게 평가하지 못하므로 경제학에서는 개발의 논리만으로 세상을 생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가치의 문제가 존재한다면 불교국가인 나라와 미국에서 가치는 서로 다르기 때문에 경제학은 서로 달라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경제학은 이런 가치를 다루지 않습니다. 물론 과학도 가치를 다루지 않습니다. 오히려 과학은 가치를 다루지 않기 때문에 객관성이 확보되고 발전을 하게 되었으며 가치를 다루는 것 자체를 금지합니다.

이게 얼마나 참신한 생각이었는지 사람들은 과소평가 합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1987년 까지는 6월 항쟁까지 이어지는 군부독재 타도를 위해서 몸을 바친 시기였고 오직 한가지 가치만 인정받고 강요받던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운동권에서는 오직 막시스트의 가치관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 당시 환경문제를 다루는 사람은 최소한 New age가 아니고는 이론적 배경을 가질 마땅한 것도 없는 듯이 보였습니다. 그당시 분명히 10년 지나면 환경문제가 두드러지게 나타날 수 밖에 없음은 조금만 관심을 가진 사람은 알 수 있었지만 불행히도 그들의 세계관을 형성해 줄만한 이론은 찾기 힘들었습니다. 이후에도 김민기씨 등이나 많은 재야 운동권 사람들은 New age에서 듣던 것과 같은 목소리로 자신의 주장을 하는 것을보았습니다. 즉 전일론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우리는 모두 유기체로 엮여 있는 구성원이라고 생각하는 말을 하곤 했습니다.

신과학이 주장하는 것은 최소한 생태학에서는 받아들일만 했으며 많은 분들이 여기에 동참했습니다.

그리고 가치의 문제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실 신과학이 이렇게 철학쪽으로 과학을 넘어서는 혹은 과학을 기반으로 하는 철학쪽으로 발전해 나가면서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신과학은 그렇게 발전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다시 신과학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신과학의 정확한 시작을 알수는 없지만 범양사의 "신과학 입문"이라는 책의 서문에는 신과학이 1960년대의 영국의 과학비판 운동에서 시작되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 굳이 영국에만 해당되는지는 모르지만 1960년대는 좀 광란의 시대였다고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 시대의 대표는 아무래도 월남전과 히피문화일테니까요. 이 시대에는 과학에 대한 회의가 일었던 시기이며, 과학교육사조로서 학문주의 과학에 대해서 엄청난 비판이 있던 시기였습니다. 과학교육은 그후로 인본주의 과학사조로 변화하게 되고, 사회도 역시 과학에 대해서 뭔가를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과학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과학을 말할 때 과학이 가치중립적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합니다. 그 이유는 과학의 결과물들이 현실속에서는 가치와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때문입니다. 즉 완전히 중립적인 연구가 없지는 않겠지만 상당수의 과학은 가치 문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지식사회학의 주장은 과학자들에게는 다른 방식으로 주장되면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과학이 중립적이라고 하지만, 그 과학의 성과물들이 과연 가치와 분리되어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만약 그 실험결과들이 우리들의 생활에 밀접한 영향을 준다면 그 연구성과나 기대되는 연구성과에 대해서 일반인들이 참여를 해야할 필요성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핵무기를 만드는 기술은 분명히 핵을 만드는데 쓰일 것입니다. 일부 과학자들은 그 기술이 다시 원자력 발전소를 만드는데 쓰이는 기술이기도 하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많은 기술이 비슷하지만 발전소를 만들기 위한 기술은 그외에 많은 부가적인 기술이 필요하며, 지식사회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핵을 연구해도 인간에게 유용한 방향의 연구를 해야하며 이점에 대해서 일반 대중들과 합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이 이러한 비판을 받아들이건 받아들이지 않건 상관없이 이런 운동은 거세어 지고 있으며, 현실속에서도 이미 이러한 세력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실 기초실험을 하는 많은 실험실들이 이러한 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영향을 미친다면, 그런 순수 연구비보다는 기술적인 연구를 하라는 정책정도에 영향을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환경운동의 경우는 문제가 심각하게 되어 버립니다.

환경문제는 그것이 생태학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과학적인 지식을 근본으로 하지만 아직까지 문제는 생태학은 가치중립적인 사실들이기 때문에 그것을 아우르는 철학의 지지가 없다면 성공할 수 없다는 약점이 있습니다. 생태학이나 진화론에서는 인간은 다른 종과 같은 지위를 가지는 것이지 인간이라고 더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과학을 그대로 놓아두었을때 일어나는 극적인 변화는 핵무기의 개발이었습니다. 문제는 결과적으로만 본다면 핵무기의 개발은 상호 확인 파멸을 의미할 뿐이며, 전쟁의 위험을 제거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핵을 사용하기를 원하는 것은 정치가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때문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과학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과학이 진보할수록 그 과학이 인간해방보다는 오히려 정치적으로 억압의 수단으로 쓰이게 된다고 비판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은 과학자들은 민중을 위한 과학을 해야한다는 주장했습니다. 일부 과학자들은 과학은 가치 중립적이기 때문에 이러한 개념은 말도 않된다고 할지 모르지만 앞서 말했듯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분야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 반론은 크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학 자체는 가치 중립적일지 모르지만 그것을 가치중립적으로 놓아둘 사람은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왜 지금까지 이러한 이야기를 계속했냐하면 바로 이것이 신과학 운동의 기원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영국의 과학에 비판 적인 사고는 미국에서는 신과학운동으로 전개되어 나갔습니다. 현재 신과학 비판서적이 앞서 말한 관점이 아닌 기, 텔레파시, 초능력, 등등을 내용을 신과학의 전부인양 비판하는 것은 저자들이 주로 미국의 서적만을 인용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신과학운동은 몇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우선 인식론적으로 환원주의를 거부하고 새로운 인식론을 열어나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에 가장 중요한 역활을 한 사람들은 역시 생태학자들, 환경론자들이며 한명 더 포함시키면, 러브락의 가이아 가설입니다. 이들은 다른 것보다는 holism을 기초로 하여 이론을 설명해나가고 있다. 물론 이들이 전부 신과학운동자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프리죠프 카프라의 책을 비판하기도 하고 칭찬하기도 합니다. 그는 물리학자이고 대단히 유명하진 않다고 하지만 그의 책은 소칼의 "지적사기"에서도 좀 읽을만한 책으로 선정할 정도로 초기의 책들은 나름대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많은 사람들이 프리죠프 카프라의 오류들은 만약 그것이 오류가 맞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전부 프리죠프 카프라의 오류라고만 봐서는 않되고 보어에서부터 그런 싹이 터있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보어가 태극문양을 선호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가이아 가설은 신과학에서는 주된 이론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러브락 자신은 신과학에 아주 못마땅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신과학이 처음의 모습에서 최근에는 온갖 사이비들의 온상이고 무비평적이고 신과학에 맞을 것 같으면 모든 것을 가져다가 아전인수 격으로 설명하는 사람들과 같은 취급을 받고 싶지는 않았지 않나 싶습니다.

사실 많은 신과학 비평의 서적들이 신과학하면, 기, 자유에너지, 초능력등을 상상하지만, 초기의 신과학서적에는 이러한 내용이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범양사의 신과학입문에는 기나, 자유에너지, 초능력은 아예 다루지도 않으며 프리죠프 카프라의 책 "새로운과학과 문명의 전환"에서도 사실 읽은 기억이 없습니다. 아마 나오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비평형 열역학, 창발론, 마이클 폴라니의 암묵지, 시스템론, 정보이론, 무산구조, 엔트로피, 홀로그램, 데이비드 봄, 생태학, 자기 조직화등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앞서 말했듯이 전체적으로 이 지구는 하나의 계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들의 상당 부분은 상대적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상대주의라는 것을 문화에만 한정하지 않고 일부는 과학전반으로 확대해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그런 해석에는 반대합니다. 하지만 문화와 문화 사이에 차이에 대해서는 서로 인정해야 하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사실 서로 다른 문화를 한 문화가 열등한 것이 아니라 동등한 입장으로 보게한 것은 이와는 약간 다르지만 포스트 모더니즘입니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사실 극단적인 상대주의자들이 많고 개인적으로 솔찍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소칼의 "지적사기"에서 나온 것처럼 그들은 엄밀하지도 않고 제멋대로 글을 쓰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결론적으로 저는 포스트 모더니즘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포스트 모더니즘의 한가지 강력한 주장의 하나는 서양 말고 다른 문화에 대해서 무시하는 풍조는 없앴다는 것입니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가장 대표적인 영화를 하나 지적한다면 팀 버튼 감독의 영화 "가위손"입니다. 이 영화를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이 영화는 현대 문명을 비판하는 영화입니다. 깨끗하고 정돈된 아름다운 동네에서 사는 사람들은 오히려 악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지만 어둡고 침울해 보이는 성에 살고 있는 미완성의 존재는 착한 마음씨를 가졌다고 이분법적으로 그려내고 있으며, 이 내용의 결론은 우리 사회가 가장 좋은 사회는 아닐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팀 버튼 감독의 기괴한 영화들은 사실 포스트 모더니즘과 매우 밀접합니다.

신과학 운동의 가장 중요한 특징중의 하나가 바로 과학자들의 입지에 대한 것입니다. 앞서 충분히 말했지만, 신과학 운동에서 과학자들은 더 이상 가치중립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 않고 그 시대의 여러 주변 환경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과학 운동의 다른 특징은 이러한 각성을 통한 어떤 운동을 주장한다는 점입니다. 즉 실천하지 않으면 않된다고 강력하에 요구하는 것입니다. 역시 이 것은 생태운동이나 환경운동으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신과학 운동의 변질

신과학 운동이 변질된 것은 서너가지 정도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로는 신과학 운동이 주장하는 holism은 사실 애매한 주장이었습니다. 그 주장이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그 개념이 명확하게 어떻게 지구와 생태계를 봐야하는지는 설명해 주지만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막연한 소리뿐입니다. 그러므로 기존의 과학에서 simulation을 통해서 환원주의 시각으로도 충분히 이를 다룰수 있게 되자 더 이상 이러한 주장은 철학적인 가치 이외에 어떤 우위를 차지할 수 없었습니다. 즉 다시 말해서 그들은 기존의 과학을 뛰어넘는 전체적인 틀로서의 과학이론들과 철학을 결합했지만 기존의 과학 자체가 엄청나게 빠르게 발전하면서 굳이 기존의 과학을 벗어나서 생각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과학은 원래 개념이 애매하면 절대로 발전하지 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환원주의자들은 그들이 목표를 잘 설정하면 오히려 막연한 holism 보다 우월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애매한 개념은 수량화가 되어가지 않으므로 기존의 과학이 이를 극복하게된다면 애매한 이론은 바로 폐기되는 것이 과학입니다.

두번째는 신과학을 주장하는 많은 사이비 이론들이 자신들이 신과학이라고 주장하게 된것입니다. 신과학에 가장 큰 피해를 준 이론이 아마도 전 셀드레이크의 형태장 이론이라고 봅니다. 100마리 원숭이라는 말로 유명한 이 이론은 사실 잘못된 근거에서 시작했습니다. 그외 신과학에는 갑작스럽게 사이비 이론들이 많이 포함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것들은 과연 프리죠프 카프라가 읽었다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방건웅 박사의 "신과학이 세상을 바꾼다" 이후부터의 신과학은 거의 사이비이론의 집합이 되어 버렸습니다.

세번째는 신과학자 자신들의 문제라고 봅니다. 그들은 엄밀하게 과학을 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우선 알아야 할 것은 과학을 다루지 못하는 것은 다루지 않습니다. 앞서 말한 가치 문제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그런데 전통적으로 가치 문제를 다루면서 기존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서 혹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이미 100년전에 과학자들이 버려두었던 방식들, 즉, 선, 명상, 호흡법 등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여기에서 뭔가 깨달음을 얻었는지 기나 프라나, 혹은 이와 비슷한 생기론적 개념들을 무차별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나중에는 자신의 신념에 의한 주장을 하면서 과학적으로 잘못이 명백한 것조차도 받아들이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신과학이 과학이 아니라고 해서 그것을 버릴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가치의 문제가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과학으로 다룰 수 없다면 우리는 과학너머의 무었인가가 필요하지 않겠는가라는 것이 제기되었고 그 해결방안으로 신과학이 나왔기 때문에 과학이 아니라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 커다란 상처를 주지는 않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가장 실망시킨 것은 그 신과학이라는 것이 기존의 사이비 과학을 무책임하게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들이 이러한 것에 New age라는 이름을 붙였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신과학이 설자리를 잃게 된 것은 그들이 예상했던 문제점들이 사실, 거의 기존의 과학으로 편입되서 극복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만약 석유가 거의 고갈되가고 대체연료가 없는 그런 상황에서라면 쉽게 받아들여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고갈된다고 주장했던 석유는 아직도 말로만 고갈된다고 하면서 뭔가 심각한 느낌을 주지 않고 미국을 비롯한 서방에서는 생태문제는 이젠 커다란 문제가 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물론 지구 자체의 생태계는 아직 회복되지 않고 악화되고 있을지 모르지만 이제 서양인들의 피부에 닿는 환경문제의 심각성은 많이 사라졌으며 기존의 과학에서 충분히 다룰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존의 과학을 굳이 비판해야 할 필요성이 없어진 것입니다. (물론 이 입장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분들도 많은 것입니다.)

 

신과학 비평

신과학을 비평하는 것은 저로서는 주로 후기의 신과학의 문제들, 비 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인 주장에 대한 것을 비평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그런 비평을 하면서 굳이 신과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개별적인 내용들이 다 어떤 항목을 이루고 있으며 굳이 신과학에만 포함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신과학이라고 통칭하게 되면 앞의 부분, 즉, 과학과 가치의 결합을 통해서 환경운동을 하려는 사람들에 대한 비난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과학이 지금처럼 변질된 상태에서도 아직도 막연한 지지를 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아마도 그 사람들이 프리죠프 카프라의 책을 읽고 많은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프리죠프 카프라의 양자 물리학을 비롯한 많은 잘못된 내용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책에는 그런 내용뿐만이 아니라 많은 문제들을 지적하고 그 나름대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가 그 사례를 제시하면서 하고자 했던 많은 말들은 비록 그의 이론이 틀린 것으로 판명이 난다고 하더라고 그냥 사라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론은 다른 뭔가로 대체되겠지만 그가 지적한 많은 문제들을 설명하는 것이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과학의 문제만이 아니라 가치문제를 포함하기 때문에, 쉽게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신과학 운동은 이제 실패했을지도 모른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 실패는 다시 다른 운동으로 변화해서 나타날 것이며 이 경우에는 좀더 초기의 신과학적인 모습에서 발전되어가리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