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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eptical Philosophy for Everyone by Richard H. Popkin, Avrum Stro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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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sophical Skepticism, 철학적 회의주의

The passion for philosophy...may only serve...to foster a predominant inclination...of the natural temper….There is, however one species of philosophy which seems little liable to this inconvenience, and that because it strikes ... no disorderly passion of the human mind, nor can mingle itself with any natural affection or propensity; and that is the Academic or sceptical philosophy….It is surprising, therefore, that this philosophy, which in almost every instance must be harmless and innocent, should be the subject of so much groundless reproach and blame.
--David Hume, Inquir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The worst speculative Sceptic ever I knew, was a much better Man than the best superstitious Devotee & Bigot.
--David Hume (Letter to Gilbert Elliot of Minto, March 10, 1751)

철학적 회의론(Philosophical Skepticism) 이라는 것은 일반적분야 이거나 특정한 분야들에서 절대적인 지식과 진실이 존재할 수 있다는 개념에 대해서 체계적인 의문을 던지는 비판적인 태도이다. 철학적 회의론은 어떤 실증적주장(positive statements, 역주 : '무엇이 어떠하다'라는 주장은 실증적 주장(positive statement)이고, '무엇이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은 규범적 주장(normative statement)이다.)의 집합은 신뢰할 만하고, 절대적으로 확실하고 진실이라는 주장을 견지하는, 철학적 독단론에 반대하는 것이다.

철학적 회의론은 일반적 회의론과 구분되어야 한다. 일반 회의론에서는 특정의 믿음이나 믿음의 종류에 대해서, 특히 그것을 믿을 만하다는 근거가 미약하거나 근거가 없기 때문에 의심을 하는 것이다. 일반 회의론자는 쉽게 믿거나, 속지 않는다. 그들은 쉽게 신뢰하지 않으며, 믿기전에는 증거를 봐야만 한다. 일반회의론자는 종교적인 기적과 외계인 피랍, 정신분석등에 대해서 회의적이다. 그러나 절대적인 진리 혹은 지식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모든 지식관련 주장에 손상을 입히기 위한 체계적인 논증 때문에 이러한 것들을 의심하는 것도 아니다.

반면에 철학적 회의론자는 매우 쉽게 속는 수가 있다. 고대의 철학적 회의론자에 대해서 알려져 있는 사실들은 거의가 200년 경에 활약했던 섹투스 엠피리쿠스(Sextus Empiricus)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는 특히 어떤 종류의 동물은 수정이라는 생식과정을 무시하고, 불꽃이나 잘 숙성된 와인과 진흙 스라임, 당나귀, 양배추, 과일 그리고 동물의 유해로부터 생겨난다고 믿었다.

철학적 회의론의 역사는 매우 오래된 것이다. 예를들면, 소피스트였던 고르기아스 (Gorgias, 483-378 BC)는 세상에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거나, 혹은 만일 무엇인가가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을 알 수 없으며, 혹은 만약 무언가의 존재를 알 수 있다고 해도, 그것과 교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고르기아스는 철학적 회의론자보다는 소피스트로서 알려져 있다. 서양철학에서는 일반에게 최초의 철학적 회의론자로 여겨지고 있는 것은 퓨론(Pyrrho, 약 360 - 약 270 BC)이다. 퓨론과 그의 추종자들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또, 철학적 회의론에 있어서 그 다음으로 칠 수 있는 사람은 플라톤이 세운 아카데미아(Academy)를 이끌던 아르케시라우스(Arcesilaus, ca. 316-241 BCE)와 카르네아데스 (Carneades, 214-270 BC)이다. 퓨론주의자와 아카데미아파가 옹호한 것은 고르기아스가 가졌던 니힐리즘과 비슷한 것이었다.

회의주의자라고 불릴 수 있는 또 다른 소피스트도 있다. 예를들어,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480-411 BCE)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일반적으로는 세상에 절대적인 기준과 가치가 없으며, 각자가 모든 것의 진실에 대한 기준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된다. 이러한 관점을 도덕률에 적용하면, 세상에 절대적인 도덕적 가치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철학적인 회의주의의 한 형태인 ""도덕 상대주의(moral relativism)"가 된다.

고르기아스의 회의주의는 모든 지식은 지각된 경험(sense experience)에서 나오며, 지각된 경험은 사람과 사람마다, 순간 순간마다 다 다르다는 그의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그의 관점을 지각된 경험에만 근거하는 것은 어떠한 것이라도 절대적인 확실성을 갖지 못한다는 철학적 입장인 지각적 회의주의라고 부를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철학의 역사를 통해서, 지각에 의한 경험의 부정확함을 나타내는 주장은, 특히, 플라톤(Plato)과 데카르트(Descartes)등의 독단론자들 사이에서 활발히 행해져왔다. 흔히 듣는 주장중의 하나는, 지각을 통해 얻은 것은 현상 뒤에 숨어있는 사실에 대한 신뢰할 만한 지침이 되지 못한다라는 것이다. 고르기아스와 동시대 사람이고 유물론자데모크리투스(460-370 BC)는 일반에게 철학적 회의론자로 간주되지 않지만 이와 같은 주장을 하기도 했다.

철학사를 통해서, 지각적 회의론자는, 우리들이 지각할 수 있는 것은 현상으로 표현된 사실일 뿐이므로, 이러한 현상을 일으키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말해왔다. 따라서 지각을 통해서 얻은 경험은 항상 개인적이며, 순간적이고 쉽게 변할 수 있는 것이다. 현상에 근거한 추론으로는 실수를 피할 수 없고 우리들은 추론과 판단이 바른지 어떤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회의주의자에게, 경험적인 지식에 대한 개연론(probabilism)적인 방어마져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지각적 회의주의가 이성(Reason)과 논리(Logic)라고 이름붙인 절대적인 진리를 찾는 것을 막지도 못했다.

아마, 절대적인 진실의 존재성에 관한 비판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진실을 평가하는 기준에 관한 회의론자들의 주장일 것이다. 어떤 주장이 진리라는 것을 판단하는데 사용되는 평가기준은 그 평가기준을 평가하기 위해서 새로운 평가기준이 필요하고 이러한 것이 영원히 계속되기 때문에, 쉽게 도전을 받는다. 하지만, 이러한 논증이 플라톤과 데카르트같은 철학자들에게 진실을 명확히 하기 위한 절대적으로 확실한 평가기준을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대부분의 회의론자들은, 이러한 평가기준이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절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지만, 아마 성 어거스틴의 의견은 받아들일 것이다. 성 어거스틴은 바른 의견은 절대로 존재하지만, 이것들은 논리학 문제이거나 정의의 문제일 뿐이지, 어떠한 주장이라하더라도 간단히 지각할 수 없는 사실 이상의 것의 확실성(certainty)을 확립하는데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

고대의 회의주의자들은 사물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들 예를들어, 확실성(確實性: certainty)과 지식(knowledge, 앎)이 존재하는 가에 대해서도 의견이 일치했던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확실성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믿었으며, 다른 사람들은 지식이 가능한지 알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지식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입장은 자기모순으로 보인다. 지식을 아는 것이 가능한지 어떤지 모른다고 하는 관점은, 사람들은 그 사람이 지식에 도달할지 확신할 수 없지만, 알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합리적이라는 개념과 서로 일관성이 있다. 또 고대의 회의론자중에는 강한 의견을 갖지 않는 것이야말로 이상적이라고 주장하는 자도 있었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다른쪽의 의견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있다면 그쪽 의견을 믿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것 같다. 대부분의 고대의 회의주의자는 어떤 사람이 어떠한 것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확실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사람은 모든 것에 대한 판단을 보류해야 한다고 단순히 믿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이러한 관점은 자기 모순일 수 있다. 이 원리에 따른다면, 이 주장에 대해서도 받아들이지 말고 판단을 보류해야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무것도 알 지못한다, 혹은 알 수 없다는 주장이나, 양쪽 주장이 거의 같은 정도로 증거로 뒷받침 될 때에는 그들 주장에 대한 판단을 보류해야 할 것이다.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은 사실일지도 모르지만, 모든 주장이 다 같은 정도로 옳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대부분의 철학적인 회의주의자에 따르면,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믿음에 대한 근거로 절대적인 확실성만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확률(개연성)을 이용할 것이다.

그리스어로 스켑티코이(skeptikoi)는 사색하는 자 또는 탐구자라는 의미다. 소크라테스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나는 아무것도 알고 있지 않다는 것 뿐이다'라고 말했지만 "우리는 이것을 탐구해야 한다"는 뜻을 가진 "스텝티온"이라고 몇 번을 말하기도 했다. 이것은 "탐구하다"고 하는 의미이다. 퓨로니트스는 대부분의 시간을 스토아 학파(Stoics)와 에피쿠로스 학파(Epicureans)등 독단론적 입장에 있던 다른 철학자의 반론으로 보냈지만, 진리를 추고했다. 어떤 주장과 그 반론이 비슷하게 확실한 경우, 퓨로니스트들은 판단을 보류했다. 확실히 그들은 이러한 자세를 택하는 것이 마음의 평온 (아타락시아)이라는 목적에 맞다는 것을 발견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가져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좋은 것 진리를 가지지 못했을 때, 그리고 자신들이 알고 있는 진리를 남들이 받아들이기를 거부할 때 평온을 깨는 것은 다름아닌 독단론자들이기 때문이다.

고대의 회의론 학파중에 아카데미아파는 창립자 플라톤의 형이상학적 독단론을 부정하고, 개연성을 방어했다. 절대적 진리와는 달리 개연성은 가능한 것이며, 또 인생의 중요한 일에 있어서 유익하다고 하는 것은 이 관점이며, 이 사고방식이야 말로 17세기의 근대과학의 진보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데카르트와 대륙합리주의자(Continental Rationalists)를 필두로 하는 독단론자는 수학(해석기하학과 산술)에 기여했으나, 물리학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한편 왕립협회와 영국 경험론자들(British Empiricists)의 개연론자(probabilist)는 근대적인 경험론적 과학을 가능하게 했다.

경험론적인 것에 관한 개연론은 회의론자에게는 합리적이라고 생각되었지만, 이러한 태도는 형이상학적 입장에서는 비합리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형이상학적 회의주의 (실증주의라고 알려졌다.)의 한가지인 신학적 회의주의는 언급할 가치가 있다. 신학적 회의론자는 신에 관한 지식의 가능성에 대해서 의심을 품는다. 신학적 회의론자에는 무신론자도 있을지 모르나, 회의론과 무신론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으며 신학적 회의론자는 유신론자불가지론자도 될 수 있다. 신학적 회의론자는 신이 존재하는지 어떤지 우리들은 확신할 수 없다고 한다. 이런 관점은 우리들은 무신론자이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결부되는 것도 아니다. 신학적 회의론자는 반드시 절대 진리의 명제만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신학적 회의론자 중에는 신의 존재 보다도 신의 비존재 쪽이 증거가 많고 획실하다.라고 하는 이유로 무신론을 옹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유신론자는 무신론자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고 유신론이 맞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할 것이다. 불가지론자는 신학적 회의론자와는 달리 유신론도 무신론도 어느 쪽도 더 나을 것이 없다는 입장을 견지할 것이다.

신학적 회의론은 신학적주장의 본질과 인간의 마음의 본질에 근거를 두고 있다. 신학적 주장은 인간의 지식의 한계를 넘는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일부 회의주의자는 신으로 부터의 계시가 필요하다고 단언한다. 일반회의론자가 무신론자이기도 한 경우는 신학적 회의론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을 것이다. 일반회의론자가 무신론자가 되는 경우 그것은 단지 신을 믿기에 충분할 만한 근거거 거의 없기 때문일 것이다.

형이상학에 대한 의심을 제공하는 것뿐만 아니라, 일부 회의주의자는 어떤 특정한 주장을 대해서 논의를 일으켰다. 회의주의의 역사중에서 가장 유명한 회의주의자 중의 한 명은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1776)으로 그의 쓴 기적(miracles)에 대한 회의론적 주장은 현재도 단일 논문으로서는 회의론의 역사중에 가장 뛰어난 것으로 여겨진다. 사실, 흄은 그의 주장이 "모든 종류의 미신적인 망상에 대한 영원한 검사방법"이 되길 바랬다. 기본적으로, 흄은 같은 이유로 우리를 물어 뜯으려는 사나운 개를 피하는 것은 합리적이라고 말했다. 기적에 관한 주장은은 자연 법칙을 위반하는 사례가 발생했다고 단언하는 것이다. 자연 법칙은 경험에 기초한 것이다. 경험은 악의를 가진 개를 피하는 것을 돕고, 기적적인 사건을 을 판단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어떤 일을 기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경험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성을 버리고 순수하게 신앙만을 믿지 않는 한, 우리가 이런 일을 대할 때에 경험만이 이러한 문제에 대한 유일한 도움이 된다. 그는 설득력있고 간결하게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기적은 자연법칙을 위반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연법칙은 일정 불변한 경험으로부터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기적에 대한 반대의 증거는, 사실(fact)의 본질상, 상상할 수 있는 경험으로부터 나온 것은 그 모든 주장이다."

흄의 논증이 잘 적용되는 것들에는 어떠한 미신적인 망싱이 있을까? 흄의 논증은 동종요법, 채널링, 아스트랄 프로젝션, 공중부양, 전생회귀, 심령수술, 지도를 이용하는 다우징 및 우리에게 지침으로서의 경험을 포기하게 하는 다른 것들에게 적용될 것이다. 그러나, ESP에 대한 주장은 이것을 옹호하는 자들이 ESP는 자연의 법칙의 밖에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 한 흄의 논증에 적용되지 않을 것이다. ESP의 옹호자들이 ESP는 자연의 법칙을 따르고 있지만, 아직 우리가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한, 흄의 논증은 적용되지 않는다.

논리학은 독단론이 정당화되는 분야라는 것은 많은 회의론자가 동의할 것이다. 단일 명제는 진실 혹은 거짓이지 둘다 해당할 수 없다 배중률(principle of contradiction)은 많은 회의주의자들이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공허한 이야기다. 즉 이러한 진리는 경험세계에 대해서 아무것도 드러내주지 못한다. 배중률과 항등원리라는 형식적 진실 뿐만 아니라, 많은 회의론자 들은 의미론상의 진실, 즉 정의에 의한 진리인 명제도 받아들일 것이다. "독신남자는 미혼의 남성이다"라는 명제는 진실이고, 경험의 세계에 대한 정보를 주고 있다. 그러나 이 명제는 약속의 문제이지 발견된 사실이 아니다.

철학적 회의론은 현실 생활에 대한 문자 그대로, 실생활의 지침이 된 적은 전혀 없었다. 최초의 회의론자도, 비록 그들의 지각이 그들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사나운 개가 그들을 물어 뜯도록 놔두지 않았다. 설사, 어떠한 현상이 사실인지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다고 증명할 수 없지만, 경험은 나쁜개가 발을 물어 뜯게 하면 어떻게 될지 추측하는 데 있어서 경험은 좋은 지침이 된다. 회의주의자들은 지각에 의해 인지된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개가 물어 뜯으면 상처를 입게 되며 벌꿀은 달다. 회의론자가 부정하는 것은 물어 뜯는 개의 겉모습 뒤에는 "개의 본질(dog essence)"이 존재한다거나, 벌꿀을 달다고 느끼는 것은 "단맛"이 벌꿀의 본질(essence)의 한 부분이라는 추론에 대한 정당화이다. 회의론자는 외형과 주관적 경험을 부정하지 않으며, 개에게 물리면 실제로 아프고, 우리는 그들이 아파하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회의론자는 주관적 경험으로부터 현실세계를 초월한 확고한 진실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쉽게 변하는 경험을 초월하는 사실, 즉 "객관적 사실"을 추론하기 위해서는 잘해봐야 개연적인(probabilisitc) 언어로 밖에 표현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의 회의주의는 옹호자들에 의해서 인생의 지침이라고 간주되었다. 그들의 인생의 목적은 마음의 평온으로, 전혀 혼란함이 없는 상태이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을 부정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은 아니었다. 독단주의를 거붛는 것이 오히려 인생의 목적이었다. 독단주의와 싸우는 방법을 찾는 것은 아직까지도 철학적인 회의주의의 중심 요소이다. 회의주의자들에 의하면 과학에 있어서나 일상 생활에 있어서 절대적인 확실성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과학은 사물의 겉만 볼 수 있으며 확률적이긴 하지만 꽤 잘해나갈 수 있다. 우리는 절대적인 확실성 없이도, 도적적인 원리를 포함해서 일생활의 지침을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어떠한 원리들이 우리가 원하는 평화롭고 행복한 삶으로 인도할 수 있는지 생각해 낼 수 있다. 많은 회의주의자들은 자연과 관습은 스스로 가장 좋은 상태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여, 극히 보수적인 생활 스타일을 옹호한다. 그들은 자신이 태어난 나라의 법과 종교적인 관습을 포함해서 여러 가지 관습을 따른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의 자연적인 욕구를 따르는 것은 좋은 삶에 대한 믿을 만한 지침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보수주의는 대부분의 회의주의자에게 아타락시아라는 목적에 잘 도달하게 하지만, 이것이 불합리한 추론이다. 즉,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것은 지각적 혹은 도덕적 회의주의에서 합리적으로 추론한 것이 아니다. 과학을 지지하기 위한 개연론 (probabilism)정도면 실생활에 충분할 것이다.

독단주의적인 철학은 형이상학이 오래전에 사라져 버린 시대에서 점점 희귀해지고 있으며 이것은 회의주의자가 독단주의자와의 전쟁에서 승리했음을 나타낸다. 논리학은 전문적인 철학자들이 절대적인 확실성에 대해서 진지한 얼굴로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철학 분야이다. 21세기에 플라톤이나 헤겔이 다시 나타날 가능성은 이제 매우 낮아 보인다. 오늘날의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그들의 하고 싶은 말은 개연론적으로 주장하고논리적인 원리를 개념에 적용한다.


읽기 자료

reader comments

Hume, David. An Inquir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ch. x "Of Miracles," (1748), Bobbs-Merrill, Library of Liberal Arts edition.

Hume, David. An Inquir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ch. xii "Of the Academical or Skeptical Philosophy," (1748), Bobbs-Merrill, Library of Liberal Arts edition.

Kurtz, Paul. The New Skepticism - Inquiry and Reliable Knowledge (Buffalo, N.Y.: Prometheus Books, 1992).

Popkin, Richard H. History of Skepticism from Erasmus to Spinoza(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79).

Popkin, Richard H. "Skepticism" in The Encyclopedia of Philosophy, vol 7, pp. 449-461, ed. Paul Edwards (Macmillan, Inc., 1967).

Popkin, Richard and Avrum Stroll. Skeptical Philosophy for Everyone (Prometheus,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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